사회 복지 선교
우리나라는 좁은 뜻의 아동 ·노인 ·장애인에 대하여 금전 급부 이외의 이른바 서비스 급부의 방법으로 행하여지는 여러 활동의 총체를 의미한다. 또 여기에 공적 부조(公的扶助: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체가 자력 조사를 매개로 행하는 경제적 부조)를 덧붙인 사회복지사업과 동의어(同義語)로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반면 영국과 미국경우는 사회정책 ·사회보장 ·주택보장 ·공중위생 ·비행문제대책 등을 포함하는데, 넓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 영국
- 정부와 민간영역이라는 두 복지주체로 구성
- 70년대는 주로 주 정부와 지방정부가 복지 실천가의 대부분을 고용
- 80년대는 59%가 민간영역에 고용, 재정의 85%가 민간영역에 해당할 정도로 민간영역이 확대
○ 영국의 주요 사회복지
- 사회보호: 노인, 장애인, 아동 등을 대상으로 하는 보호서비스를 지역사회가 제공하는 활동
- 사회조직: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지역사회문제해결을 위한 기관들의 연계 및 조정활동
- 사회개발: 사회 구성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자기 확신과 대처기술 획득을 위한 지원활동
- 사회계획: 사회 문제해결을 위한 조사에 근거한 대처 방법의 우선 순위 설정
- 사회교육: 사회 구성원에 대한 교육
- 사회행동: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역량강화활동 - 여성주의 지역복지사업
- 반인종적 지역복지 사업 등
2) 영국의 지역사회복지
○ Popple(1995) “지역복지사업이란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지역사회구성원들의 역량을 강화하여, 구성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개발 시키는 활동”
○ 영국 지역사회복지 발달 단계의 특징
- Popple는 영국에 있어서 지역사회복지사업이 온정주의적 전통(영국의 식민통치와 COS와 인보관운동)과 집합적 지역사회행동(임대료관련 데모 및 실업 관련 운동) 등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았음
○ 발달단계별 특징
① 1800년대 말 - 1900년대 초:
- 온정주의적 전통의 측면:
․식민지 국가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지역사회 개발 방식의 활동 전개
․자선조직협회 활동(COS)을 통해 지역사회 빈민들을 대상으로 한 원조서비스 제공이 지역사회복지 사업의 효시(개인적 수준에서의 접근)
․인보관활동을 통한 지식인 계층 가운데 일부가 빈곤지역에 정주하면서 펼친 교육 문화활동
- 집합적 사회 행동의 측면:
․슬럼가를 중심으로 한 임대료 상승에 대한 저항운동
․대공황으로 발생한 대량실업문제 극복을 위한 지역센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실업운동 및 이주민 사회적응 운동
② 사회민주주의 시기의 지역복지 사업( mid-1940s - mid-1960s)
- 민간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던 지역복지 사업이 국가의 책임아래 놓이는 전기가 마련된 시기
<- 배경: 2차 대전 이후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간 합의를 통해 사회민주주의 출현하고 이어 1945년 노동당 정부의 출범으로 사회정책화 되었음
- 국민의 복지 욕구충족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는 전제하에 지역복지의 책임을 지방정부관할로 이양
- 지방정부 산하에 ‘사회서비스담당 지방위원회(Local Council of Social Service)가 설치되고 지역센터와 더불어 지역사회 서비스제공 주체로 자리매김
- 지역사회보호(community care) 개념의 출현: ‘시설에서 지역사회로’
- 1960년대 경제적 위기로 말미암은 지역사회행동(community action)이 부각된 시기이기도 함
- 굴벤키안 재단(Calouste Gulbenkian Foundation)의 지역사회복지사업 전문화 할동 지원: conference 등 각종 연구 지원사업 실시하고 지역복지 담당 전문가 역할 탐색 지원(Seebohm Report)
③ 지역복지 사업의 황금기 (1960s 후반-1970s 후반)
■ 미국
- 미국 지역사회복지의 효시: 1889 Jane Addams, Chicago Hull House,
: 지역사회조직의 핵심은 주택문제, 공공위생문제, 고용착취문제 등에 대한 대학생들의 사회개혁운동으로 출발하여, 지역사회의 욕구 파악과 그 해결을 위한 자원 개발 및 연결이었음
⇒ 영향 : 사회적 참가와 협동, 민주적 접근, 학습과 성장,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과의 상호작용, 사회 환경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의 인식
○ Kramer & Specht(1975)의 4단계 지역사회조직 운동의 진행과정
① 자선조직화 운동시기(1865-1914)
② 지역공동모금회와 지역복지협의회 시기(1914-1929)
③ 공공복지사업의 확대와 지역사회조직의 전문화시기(1929-1945)
④ 지역사회조직의 정착시기(1955-1968)
⑤ 신보수주의의 등장(1969-1980s)
① 자선조직화 운동시기(1865-1914)
○ 사회적 배경
산업화(노동시간, 작업조건, 안전, 아동노동 등), 도시화(도시인구집중, 열악한 사회환경), 이민(유럽, 아시아, 멕시코 이민들이 적응문제),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족의 문제들
② 지역공동모금회와 지역복지협의회 시기(1914-1929)
- 개인의 치료에 역점을 두는 접근(개별사회사업) -> 정신분석 이론이 영향 등
- 인보관 근무자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교육자, 레크레이션지도자, 집단지도사업가 등에 두고 지역사회조직가로서의 자기규정은 미미
○ 지역공동모금제도 실시
- 도시화 가속화 -> 사회복지기관의 증가 -> 재원마련과 구호방법 개선 바안에 대한 고민 증대 -> 지역공동모금제도(Community Chest United Fund), 지역복지협의회(Community Welfare Council) 설립 계기 마련
- 지역공동모금제 방법: 기관들의 연합으로 하나의 기금을 조성(덴버 자선조직협회), 사회복지기관협의회에 의해 조직(세인트루이스. 컬럼비아, 디트로이트 등), 거액기부자가 단독으로 설립하는 경우 등
- 기관기준 설정 및 기관의 활동능력 평가에 의한 기관지원(=지역공동모금제도) 방법에 대한 사회복지기관 독립성 훼손이라는 비판 제기
->> 1913, 자선연합회(Federation for Charity and Philanthropy) 창설
연합회 구성: 기부자(contributor), 모금활동을 돕는 사람(solicitor), 사회복지기관대표자(volunteer)
○ 사회복지기관협의회 및 지역사회복지협의회
- 사회복지전문화의 대두: 우애방문원의 유급직화, 자선학교들의 사회사업대학원화와 더불어 사회복지기관협의회 창설
- 협의회의 목적: 사회복지실천을 합리적으로 조직화하고 지역공동모금회 모금능력을 강화하여, 사회사업기관의 자치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
- 최초의 협의회 형태는 주로 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는 기관들의 연합체 성격--> 전문성강화에 따라 복지문제와 서비스에 간심을 갖는 시민들이 협의체로 확대되었음(지역복지협의회로 명치 변경)
③ 공공복지사업의 확대와 지역사회조직의 전문화시기(1929-1945)
- 미국의 사회제도의 급변시기
- 대공황으로 인한 빈곤과 대량실업 발생 ->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의 개입 필요성 대두 --> 정부 역할 증대 (사회보장법, 전시복지기금 등 도입)
- 지역사회조직사업의 성격 개념화와 전문화 노력 활성화: 지역사회조직가의 역할, 사회사업과의 관계, 지역사회조직의 목표 등에 대한 논쟁, 레인보고서, 최초 지역사회조직연구회 발족
․Raine 보고서:
- 지역사회조직사업의 개념․방법․활동․분야․자격․교육훈련 등의 체계화
- 지역사회조직사업의 주된 기능을 욕구와 자원의 조정으로 규정 - 주민참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 개념을 보급
- 욕구조사의 기술발전 도모
④ 지역사회조직의 정착시기(1955-1968)
- 지역사회조직 전공자 증가(48개 대학) - 교과과정에 ‘지역사회조직’ 과목 인정
- 사회사업 3대 방법론의 하나로 인정(개별(case work), 집단(group work), 지역사회조직(community organization)
- 주정부와 지방정부에 대한 보조금 지급
- 지역사회정신건강프로그램(Community Mental Health) 전개
- 도시재개발 등 regional planning program 실시
- Head Start, VISTA(volunteers in service to America), CAP(Community Action Program) 등 실시
⑤ 신보수주의의 등장(1969-1980s)
- 이데올로기의 보수성과 예산부족으로 인한 지역사회조직의 자조모델화 추진--> 자원봉사의 조직화 추진
- 자원봉사활동이 정부의존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원조채널 확보(기부금, 기믁모금운동, 노조, 교회, 사업체 등)
- 활동이슈의 다양화 추진: 주택, 보건, 소비자 운동 등
⑥ 사회복지개혁기(1990s-현재)
- 사회복지에 대한 보수적 경향은 지속적 -> 복지예산 삭감, 서비스 축소에 대한압력, 서비스의 민영화 추진 등 보수적 분위기 지속 -> 1996년 welfare reform: 개인적 책임과 근로연계의 강화하는 생산적 복지 강화 -> 결과 미지수, 우려증가
- 지역사회조직 또는 지역사회에 기초한 옹호적 접근 약화되고 오히려 사회복지기관의 행정과 계획, 조직발전, 평가개발에 초점, 서비스의 효율성 평가 촉진
■ 한국
○ 전통적 의미에서의 지역사회복지
- 두레: 자발적 상부상조
- 품앗이: 농촌지역 노동력 교환활동
- 계: 삼한시대부터 공동작업, 회유, 제례 등에서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eg., 婚喪契(혼상관계), 학계(장학제도), 양로계(경로잔치), 동방계(과거시험 합격자들의 모임)
- 기타 자발적 협동조직: 향도(흉사가 있을 때), 부조(집을 짓거나 농사일 돕기), 향약(지역사회와 주민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지방의 향리들이 만든 자발적 조직)
- 빈민구제사업:
․고구려의 진대법(진은 흉년에 기아민(飢餓民)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는 것을 뜻하고, 대는 봄에 양곡을 대여하고 가을에 추수 후 거두어 들인다),
․고려의 의창(중국 수(隋)나라에서 유래하여 고구려에서는 194년(고국천왕 16)부터 매년 3∼7월에 가구수(家口數)에 따라 관곡(官穀)을 대여하고 10월에 회수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이를 흑창(黑倉)이라 하여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 후에 이를 회수하는 진대법(賑貸法)을 마련),
․제위보(백성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기관),
․혜민국제(백성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기관),
․조선의 상평창(상평이란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약어이다. 즉 풍년이 들어 곡가가 떨어지면, 국가는 곡물을 사들여서 곡가를 올리고, 흉년이 들어 곡가가 폭등하면 국가는 상평창의 곡물을 풀어서 곡가를 떨어뜨린다. 또는 수확기에 사들여서 단경기(端境期)에 방출하는 방법 등으로 곡가의 부당한 변동을 방지하려는 목적)
․사창(환곡저장소) 등 국가적 차원의 활동
○ 근현대적 의미로서의 지역사회복지
- 일제시대의 지역사회복지: 식민정책의 일부로 시혜 또는 자선을 통해 일제에 충성하도록 하는 정치적 의미 내포
○ 광복이후의 사회복지
- 선교사의 역할(선진국가의 사회사업 개념 도입)
- 한국사회복지공동모금회(유명무실 상태)
- 적십자회, 수재민구호기금, 우편 및 극장모금
- 라자로돕기회, 한국봉사회의 백만임 걷기 모금 등
○ 외원기관과 사회복지
- 1952 한국자원봉사관리사협회(7개 기관):정부기관과의 유대를 바탕으로 보건, 교육, 사회복지, 구호 및 지역사회개발 분야 활동
- 6-25 전쟁 이후 자유우방국가들의 민간구호단체 활동 왕성
○ 사회개발사업
-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전통적 농촌사회의 변화과정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으로 주로 선진국가들에 의해 실시
- 우리의 경우 1950년대 농촌지도사업과 더불어 농촌개발을 위한 미국의 원조사업의 하나로 시행
- 1970년부터는 새마을운동으로 명명(관 주도적 반 강제적 운동으로서의 한계)
○ 1990년대 이후의 사회복지
- 지역사회복지의 질적 전환의 시기: 재가복지서비스의 확대, 지역사회복지실천 주체의 전문화 및 다양화, 지역사회중심의 자활사업 전개, 지방자치제의 실시 및 지역분권운동의 전개에 따른 지역사회복지의 내실화 요구, 시민사회운동의 다양한 전개 등
- 지역사회복지관의 등장:
․저소득층 밀집지역 중심의 지역사회문제 예방 해결을 위해 1983년 설치 운영되고 있음
․1990년 58개소
․2005년 4월 380개소
․ 재정구조: 국고 지방비 법인 자부담
․반민(민간법인 운영) 반관(정부 지도감독)의 형태
사회복지선교 비전
우리의 목회 현장은 영적복지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만 강조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사도 바울은“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하였다. 지역사회목회의 현장은 사회복지 진두지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대적 복지흐름에 민감할 뿐 아니라 현실적용이 잘 되어야 한다. 교회의 재정으로 모든 복지를 하려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사회에 기댈 수는 없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들어난 핵심적인 가르침은 죄인에 대한 끝없는 용서와 화해이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동체적 관심과 이들과 함께 하는 생활이다. 예수님이 이러한 가르침을 몸소 실천에 옮기셨음을 우리가 믿고 이를 통하여 구원을 확신하게 되는 직접적 계기를 찾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신앙인으로서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은 언제나 어디서든지 고통 받는 이웃을 돌보아야 되겠다는 의지가 강하며 나눔의 생활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의무이고 생애 최고의 영광으로 느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의 삶에 재하고 있다는 것을 신앙생활에서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기도 하다.
기독교사회복지는 초교파적으로 실천되어야하며 수혜대상자는 종교와 이념을 초월하여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어느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임을 인정하게 됨으로써 교회는 지역 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사회복지실천의 장으로 새롭게 태어나야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는 사회복지는 구호사업이며 자선사업이라는 개념보다는 전문성을 강조하는 학문성을 이해하고 이에 기초하여 전문적인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어야한다.
이러한 점에서 교회중심의 사회복지실천은 단순히 사회복지를 하는 것을 넘어서 교회가 주인이 되는 사회복지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농촌목회의 가장 어려운 점은 젊은이가 없다는 문제와 지역주민들의 고령화에 있다.
마을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 60세가 넘은 경우가 태반이다. 교회에도 젊은이가 없다. 교회에서 교회학교나 청년회나 중고등부가 사라진지가 오래된 교회가 많다. 그렇다고 노인대학을 따로 운영되는 경우도 드물다. 아니,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열악한 재정과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복합적인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 실천신학분야에서 선교의 동기, 목적, 실천목표 그리고 선교의 방법, 수단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고도 방대한 연구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선교의 구심체는 교회에서 출발해야하며 교회의 주요 사역임을 인정해야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체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인간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때때로 교회는 그 사회와 시대, 문화의 주역이 되어왔으며 미래사회의 비전을 제시해주는 예언자적인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 온 것처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선교의 목적, 선교의 대상 그리고 방법 등이 그리스도의 사라명과 사회적 책임이행과는 다소 불일치하는 현상을 보여 왔다. 이러한 점들은 선교의 방법이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선교이고 고통 받는 이웃이나 사회분제를 외면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지역사회주민들로부터 받아왔다. 또한 교회내부의 자성적인 사고와 발전적이고 신앙적인 비판의식과도 일치하는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선교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강조한 진정한 이웃을 발견하고 참다운 사랑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하는 크리스천의 책무이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수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실천목표는 고통 받는 이웃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전인적 치유를 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성경중심의 선교방법만이 시대와 장소에 구분 없이 인정받게 될 것이다.
선교의 단순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일어나는 인간성회복과 인간 삶 최고의 가치와 인간존엄성향상에 일차적 목적이 있다. 사회복지학 역시세계보건기구에서 정의한 건강의 개념처럼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 안녕감을 확보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목적이고 전문적 방법을 제시해주는 영역이다. 진정한 의미의 선교와 사회복지는 인간의 전인적 행복감과 사람의 질 향상, 그리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영적 안녕감을 향상시키는데 공통적 노력을 경주해야한다.
그동안 교계는 초교파적으로 사회복지선교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별다른 시효를 거두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사회복지와 선교의 과제가 이 땅에 어떻게 적절하게 표출되고 접목되어야 하며 접근해야하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한다. 사회복지선교사의 사명은 최소한의 생계유지가 가능하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서 전문적으로 봉사하는 전문가로써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라가는 제자임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1. 기독교사회복지란 무엇인가?
기독교인의 “섬김(Diakonia)은 교회 울타리를 벗어나 가까운, 그리고 먼 이웃들을 돌보아야한다. 섬김이란 경계선을 넘어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섬김이 아니다. 그리고 섬김 안에서 항상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그 보조기관들들 세우는데 있다.”(J.Timm,79). J.Timm이 밝힌 바와 같이 기독교사회복지는 우리의 이웃을 기독교적인 사고와 이해의 범주 안에 가두지 말고, 그들의 자발적인 호응을 전제로 함께 일구어가는 하나님나라 건설이어야 한다. 기독교사회복지에 대한 용어는 다른 사회복지와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과 한계가 정하는 선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점을 염두에 둘 때, 기독교사회복지는 “기독교 공동체가 지닌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소외받고 건강한 삶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 일원에게 행하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복지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사회복지는 비록 기독교인들에 의해, 그리고 기독교인이 속해 있는 기구와 제도 아래에서 행해질 가능성이 많지만 그 주체가 반드시 교회일 필요는 없다. 비정부기구나 범종교기구를 통해서 기독교의 정신에 의한 기독교인에 의한 사회복지활동은 일단 기독교사회복지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결국 기독교사회복지는 다른 사회복지와는 구별된 학문적인 영역이라기보다는 기능상의 잠정적 구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보다 겸손하게 우리의 이웃을 편견 없이 섬기게 될 것이다.(박종수,2004)
2. 사회복지에 대한 기독교적 입장
사회복지에 대한 기독교의 시각은 다양하다. 자신들의 신학사상이나 입장에 따라서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그 정의를 내리기에는 버거움이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관점으로 재조명해 보면 모든 주장에 대한 공통점이나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 이유는 그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있기 때문이다.
1) 교회중심의 기독교사회복지
교회중심의 영적인 구원을 목표로 할 것
2) 사회봉사 자체에 둔 기독교사회복지
사회봉사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로 간주한다.
3) 중립적 관점에서 보는 기독교사회복지
교회울타리를 넘어 사회에 대한 참여의식이 높은 사람일수록 가능한 한 기독교적인 용어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중립적인 용어를 사용하기를 희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4) 성경적 기독교사회복지
성경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에 대한 개념을 잘 정리하여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의 말한 교회중심의 사회복지나 사회봉사 자체에 둔 사회복지나 중립적 관점의 사회복지나 모두가 그 기반이 성경이다. 성경을 중심으로 섬김의 실천방법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때문에 흐름이 서로 다르다. 어느 한 가지만 주장하기에는 너무 너무 넓은 것이 사회복지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은 인간의 영적복지의 혜택을 수혜해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3. 성경이 말하는 사회복지
기독교사회복지에 대한 정의가 기능적인 잠정적인 용어에 해당된다면 성경역시 기독교사회복지에 대한 제한적인 영역에 머물러야한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처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성경이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을까? 아와 같은 물음은 저마다의 신앙과 종교적 믿음에 따를 것이다. 성경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일의 표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 대하여 개입하여 해결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사회복지를 위한 토대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구체적이기 보다는 원론적이며 신앙적인 조언, 혹은 신앙공동체를 위한 기본적 가르침에 한정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사회복지가 일반 사회복지이론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그동안 기독교사회복지를 위한 성경적인 근거를 관련된 성경구절만 나열하고 해석하는 원론적인 강의에 그쳤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먹음직 스럽고 탐스런ㅂ고 지혜롭게 할 만한”선악과를 따먹고 말았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인류 모두를 죄악에 몰아넣었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로부터 구원받을 때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다. 또한 인간은 언제나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형벌이 있는데 남자는 땀흘리며 일하는 것,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지는 형벌이 내려졌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죽음의 형벌을 곧바로 내리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장 큰 은혜를 주시길 원하신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길 원하시는 것이다.
2.성경적 복지마인드
모세오경을 기초로 한 유대교는 열 가정이 10분지 1식 내어놓아 (10.1조) 한 가정의 빈곤을 해결하며 같이 사는 경제적 공동체를 지향했다.
예수는 애당초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쁜소식(복음)을 강조하며(눅4:18,6:20) 그 사역에 역점을 두었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가난”,“가난한”,“가난한 행위”의 개념의 범주이다. 바울이 본 하나님의 나라는 고기와 마실 것만이 풍요한 곳이 아니고 정의, 평화, 기쁨이 함께 풍성한 이상향이었다.(롬14:7)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5:3)”라는 t kstkdtngns의 첫째가는 행복은 심령과 육체가 공히 적용되는 개념이 특히 개인적인 구원보다는 “그들”(복수)공동체가 하늘나라이고 그들이 천국의 으뜸가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절름발이, 앉은뱅이, 시각장애인 등 몸이 부자유한 사람들; 고아와 과부 같은 가족적 구호대상자들은 물론이지만 어둡고 썩고 싸움과 미워함이 가득한 사회전반에 걸친 구조적 빈곤이 일체 “기쁜소식”(복음)을 전수받아야할 대상이었고 오늘도 그러하다.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 받고",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하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함”을 느끼게 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이라는 가르침은 다 사회복지의 금 같은 근간이다. “마음이 깨끗하면”“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며,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여덟가지 행복은 한결같이 사회복지공동체를 전제로 행하는 실천행실에서 얻어지는 열매들이다. 하늘나라의 건전한 시민권자들의 윤리를 명백하게 말씀해주는 대목이다.
누가는 더 실감나게 말해준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6:12) “부유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받았다.(눅21:24)고 아주 대조적으로 그리고 냉혹하게 심판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시는 일이나 부자들을 불행하다고 단정하시는 일이나 그 깊은 뜻을 헤아리면 하늘나라가, 새로 세워일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개인도 개인이지만 있고 없는 사람들이 하나의 가족으로 변모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나라의 기쁜소식은 “우리인간의 내재적 존재 속에 깊이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또 동시에 우리 모두의 관계 속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워싱턴 글래든(Washington Gladden)이 말했다. 겨자씨 같이 적은 생명이 인간의 마음 밭에 뿌려지면 곧 온 들판에 확산된다(마13:13). 기쁜소식은 만민을 위해 만민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3. 기독교사회복지가 나아갈 방향
사회복지가 최저수입 생활보호대상자들만 붙들고 서비스를 하고 있는 현실은 이상적인 총체적 복지공동체를 지향하는 기독교사회복지의 견지에서 보면 아주 적은 일부분이다.
21세기의 인간가족이 생존해나가면서 복된 사회를 지어올리려면 우리는 적은 숫자의 생활보호대상자들만 놓고 같이 울고 가까운 이웃이 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한다. 물질의 풍요라는 역 빈곤의 계층이 우리의 클라이언트가 되어야한다. 튼튼한 중간층의 중류사회를 견지하는데도 적지 않은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사회공동체 전부를 우리의 일터로 클라이언트로 받아들여야한다.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오늘의 지구촌은 생명수의 강이 썩고, 말라가고, 사망의 독으로 변해가고 있다. 백성을 병들어 죽게 하는 나뭇잎들만 무성하게 생태계는 파괴되고 21세기에 정말 종말이 올지 모른다. 이 굶주림, 헐벗음, 싸움과 미워함, 죽이고 죽는 세상을 새로운 천지로 새 예루살렘 성으로 변화시켜가는 십자가가 교회와 크리스천사회복지사들의 몫이다.
우리가 다시 한 번 명심해야할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 모든 이웃들이 서로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그런 자리에 서기만 하면 원수가 있을 리 없고 싸우며 남의 것을 빼앗아 내 집만 넓히고 높게 짓는 일을 할 까닭이 없다.
한국교회는 십자가가 있다. 21세기는 정보홍수, 선택불능, 환경파괴 등으로 인류의 큰 과제가 대두되고 있다.
교회와 교인들이 새로운 우리의 이웃을 섬기며 우리의 있는 것을 알고 모르는 이웃을 위해 기도하며 측은히 여기며 나눠주는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캄보디아, 에디오피아, 소말리아나 브라질이나 다 먼 이웃이다. 다만 조금씩 깊이 생각하면 이 모든 나라들이 우리의 사랑을 목말라 목이 메도록 울며 기다리고 울부짖고 있다. 우리의 이웃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들은 바로 교회 담장 아래 홀로 외롭게 겨울밤을 고통 속에 보내는 노인들이나 병자들이다. 차가운 방바닥에서 추운 위풍에 떨고 있는 이웃들이 많다. 시골마을들을 돌아보니 홀로 사는 노인이나 몹시 불편한 어르신들이 많았다. 영세민혜택을 받는 사람이나 정부지원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우리가 시급히 찾아볼 클라이언트들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다가 가야할 것이다.
우리의 십자가는 무겁고 힘이 들고 쓰러질 것 같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잘 지기만 하면 한발자국씩 앞으로 향해 내어 디딘다면 갈보리 언덕에 이르게 될 것이며 부활의 동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 후 우리가 받을 십자가 뒤의 면류관은 찬란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첫째, 교회에서 실시하는 사회복지프로그램은 교회중심적인 선교의 본질을 실천하는데 의미가 있다. 교회의 기본적인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 교인과 이웃 간의 사랑의 교제, 그리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역점을 두고 그들의 문제와 욕구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에 적합한 대응모델개발과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사회복지는 크리스천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데 의미를 두어야한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급격한 사회변화를 경험하였다. 개인과 가정의 붕괴 등
셋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이웃들의 욕구가 무엇인가를 연구하여 실천해야한다.
넷째, 교회는 지역사회주민과 더불어 사회복지선교 프로그램을 실시해야한다.
다섯째, 대상자의 영적 안녕감을 추구하는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의 사회사업
지역사회를 위해 교회는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
이만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 전 숙명여대 교수
교회의 지역사회에 대한 역할은 한국개신교 전래 이래 꾸준하게 이야기되어 왔던 문제다. 초기 기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지대한 반면 현재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는 지적이 많다. 본지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실시한 "지역사회를 위해 교회는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라는 세미나를 통해, 지역사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역할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해 본다. 이만열 교수의 "한국기독교의 사회 사업"과 유수현 교수의 "한국교회와 사회사업의 실천"이라는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주>
1880년대에 한국에 수용되었던 기독교는 복음전파와 함께 사회사업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사회사업은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이다. 사회사업을 시작한 것은 복음전파의 길을 열기 위한 일종의 선교정책이었다.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편견을 갖고 있던 한국인에게 교육, 의료사업은 그러한 편견을 완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고, 또 복음을 가지고 한국인에게 접근하는 데에 크게 주효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 판단은 정확하여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의 진전은 한국인의 서양과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완화시켜, 그 결과복음 전도의 문이 쉽게 열려지게 되었다.
한국기독교의 사회사업은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사회사업은 사회를 향해 전개한 모든 활동을 통틀어 사회사업이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고 시대적으로도 최근까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몇 가지 사업을 일제하에까지만 국한시켜 연대기적으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의료사업
미국 선교사가 입국하여 장기적으로 체류하게 된 것은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 알렌(H.N. Allen, 安連)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1884년 9월에 입국하여 그 해 12월 4일의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왕비의 측근이요 수구파의 거두인 민영익을 치료함으로써 왕실의 신임을 얻어, 그 이듬해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 처음 이름은 廣惠院이라 함)을 개설하게 되었다.
이 병원은 일종의 왕립병원으로서 출발하였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건물과 운영비만 부담하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서 의사와 그 봉급을 책임졌다. 제중원은 알렌에 이어 헤론(惠論)이 병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890년에 과로로 순직하였고 그를 장사하기 위해 지금 합정동의 외국인 묘지가 확보되었다. 캐나다인 에비슨(O.R. Avison, 魚丕信)은 부임한 후 곧 제중원의 제도를 일신시켰고, 이어서 1894년에는 모든 운영비를 미국 북장로회가 부담하는 선교병원으로 전환시켰고 1904년부터는 지금의 서울역 근처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에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희대학교화 합쳐 연세대학교로 통합되면서 지금의 신촌지역으로 옮겨 왔다.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민간병원은 미국 감리회(북)의 선교사 스크랜튼(W.B. Scranton, 施蘭敦)이 1885년 9월 10일에 개원한 '시(施)병원'이다. 당시 남녀의 만남을 극도로 제한하는 내외법 때문에 시병원에서는 1887년 11월 일종의 여성전용병원이라 할 수 있는 보구녀관(保救女館)을 개설하였는데 그 책임은 여성 의료선교사인 하워드(M. Howard)가 맡았다. 처음에 시병원의 방 하나를 얻어 진료를 시작한 보구녀관은, 곧이어 단독 건물을 얻어 여성전용 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의 첫 여성병원이다. 시병원은 뒷날 남대문 근처로 옮겼으나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고 시병원이 세운 동대문의 보구녀관은 계속 발전하여 오늘날의 이화여자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발전하였다.
1890년대 초에 입국한 홀(J. Hall, 乙)은 청일전쟁 직후에 평양에서 전염병을 무릅쓰고 진료활동을 펴다가 자신이 먼저 희생당했다. 그의 부인 우드 홀이 그의 남편을 기념하여 평양에 세운 것이 '기홀(紀忽)병원'이다. 홀 부인은 이 병원을 중심으로 맹인을 위한 점자교육을 실시하여 한국 특수 교육을 시작하였다.
1890년대 선교사업이 지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지방에 진출한 의료선교사들이 병원을 설립하여 복음전도의 장을 열었다. 선교거점을 만들 적에 보통 몇 사람의 선교사들이 팀을 이루어 선교거점에서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하였다. 1890년대부터 선교사들이 각 지방으로 분산되면서 '제중원' 혹은 '구세병원'이라는 이름의 선교병원을 설립하게 되었고 이러한 선교병원을 통하여 극빈자에게 무료시술을 실시하는 등의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의료사업의 한 영역으로 나환자를 위한 구라사업이 기독교의 의료선교사업으로 출발하였다. 1909년 10월, 북장로회 선교사 어빈(Ervin)이 처음 부산 감만동에 나병원을 시작했으나 중단하였다. 1911년 호주 선교사 맥켄지(J.N. Mackenzie)가 이를 인수, 영국 구라선교본부의 지원으로 병원시설을 확장하여 1925년에는 상애원으로 발전시켰으나 1941년 미국과의 전쟁으로 폐쇄되고 말았다.
한편 1909년 이후에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월슨(R.M. Wilson)과 포사이드(H.W. Forsythe)의사는 광주 봉선리에 세 칸의 방을 마련하고 10명의 나환자를 모아 한국 최초의 나병원을 개설하였다.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자 런던 구라선교본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1925년 전남 여천군 율초면 신풍리로 이전하여 여수 애양원으로 확장되었다. 손양원 목사가 이곳에서 나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하면서 순교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1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플레처(A.G. Fletcher) 의사는 대구시 내당동에 나환자 수용병원인 애락원을 설립하고 나환자교회도 운영하였다.
1918년 장로회 제 7회 총회는 나병원을 위한 헌금을 시작하였다. 이는 나병에 대한 한국 장로회의 거교단적인 관심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제 13회 총회에서는 문둥병원위원회(후에 나병원회로 개칭)를 조직, 나병원에 대한 재정적인 지원에 힘썼다.
여 선교사 클라크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치료와 보호를 위해 수용시설을 마련하였다. 1930년에는 독지가 아담스(Caroline B. Adams) 부인의 회사와 세브란스병원과의 제휴로 병원 내에 독립병동을 개관하여 본격적으로 정신병자 치료와 보호를 시작하였다. 1932년 홀(S. Hall, 제임스 홀의 아들)은 해주 구세병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결핵환자를 돕기 위한 크리스마스 실을 제정하여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이로써 결핵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다.
아동사업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고아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한국의 경우, 고아구제사업은 학교 교육과 함께 시작하였다. 1886년 5월 11일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H.G. Underwood)는 정동에 한옥을 구입, 수리하여 학생 1명으로 '언더우드학당'을 열었는데 이것은 처음에 '고아원' 성격도 띠고 출발하였다. 이 학당은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이라 했다가 1905년에 경신학당으로 정착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경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여학교 역시 선교사 배척의식 때문에 교육할 대상(여학생)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처음에는 고아원 형태의 교육에서 출발하였다. 1886년 5월, 미감리회 스크랜튼(M.F. Scranton) 대부인이 여학당을 시작했는데, 초기의 학생들은 대부분 비천한 신분 계층 출신이거나 불우한 소녀(여인)들이었다고 한다. 1887년 6월 북장로회 선교사 엘러즈(A.J. Ellers)는 정동에서 여학당을 시작했는데 제중원에서 데려온 고아도 교육의 대상이었다. 고아사업과 학교사업이 함께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북감리회의 존스 목사 부인이 인천의 영화학교(1892)를, 호주 장로회의 멘지스(B. Mwnzies) 양이 동래 일신여학교(1895)를, 남감리회의 캠밸(J.P. Campbell) 부인이 배화학당(1898)을 설립하는 데서도 보인다. 캠벨 부인은 2명의 여아와 3명의 남아 고아를 데려다가 자기 사택에서 기거하며 그곳을 교사로 하여 교육하였다. 1892년 성공회 선교사 랜디스(E.B. Landis) 신부는 고아원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고아원사업이 본격화되는 것은 일제하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일제의 한국강점은 사회경제적으로 한국의 빈곤층을 격중시켰고 민족모순으로 인한 가정의 파괴현상이 심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낳은 또 하나의 부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3년 일본인 소다(曾田嘉伊智)가 겸창보육원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영락보육원의 전신이다. 1916년 10월, 영국 부흥전도회의 앨런 패쉬 양이 서대문 충정로의 땅과 건물을 구세군에 기증, 맹인 2명을 포함한 여자 고아 12명으로 '여자 육아원'을 설립하였다. 이는 구세군 고아원 사업의 시초로서 그 뒤 혜천원으로 명명하고 여자 고아원으로 되었다.
1918년 정자옥(丁字屋-현재 미도파) 백화점의 경영주인 고바야시(小林源六)는 3천 원을 구세군에 기증, 서대문 평동에 걸식 아동 29명을 수용하고 '걸아양육원'을 설립하였다. 그 뒤 1920년 북아현동으로 옮겼고 서울 후생학원으로 발전하여 남자고아원이 되었다.
1919년 1월 3일, 윤치호(尹致昊), 송택수(宋澤洙), 김광준(金光俊), 김태화(金泰和), 김병찬(金炳贊), 오긍선(吳兢善) 등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이들이 발기하여 '경성고아구제회'를 설립하였다. 이는 남대문교회의 장로 독지가 김병찬의 노력으로 조직된 것으로 회장으로 윤치호가 활약하게 되었다. 기독교인 의사였던 오긍선 등은 활발한 활동을 벌여 한국 민간고아사업을 처음으로 일으키게 되었다. 그는 이해 3월 서대문 옥천동에 언더우드 소유의 대지 3천여 평과 가옥을 구입하고 '경성보육원'을 설립하였다. 1920년 5월에는 3·1운동으로 고아가 늘어나 재단법인 인가를 얻어 한국 최초의 민간인 고아원으로 되었다. 이 고아원은 1935년 현재 직원 23명에 고아 204명을 수용하였고, 1936년 9월에는 안양으로 이전해 현재 '안양기독보육원'이 되었다.
한편 기독교계의 고아사업은 지방으로도 확산되어 갔는데, 그 중요한 것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921년 김병선(金炳善)이 평양 수옥리에 고아원을 설립한 것을 비롯하여, 같은 해 박경석(朴經錫)은 평양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 뒤 1936년에는 정지강(鄭志强) 목사가 평양에 애린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 1월 충남 공주에서 미감리회 여선교회가 영아원을 설립하였고, 아울러 영아를 동반한 어머니들의 모임도 두 칸 남짓한 작은 방에서 시작되었다. 1926년에는 이병준(李炳俊)이 평북 선천에 대동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이 해에 어느 미국인 독지가의 희사로 영아복지관도 설립되었으며, 영아복지관에는 진료실, 어머니 회의실, 우유공급실 등이 설비되었고, 그 후 외국 선교부에 소속된 시약소도 설치되었다.
1930년 영아생명구호소(Baby Life Saving Station)활동이 본격화되어 산전조사 및 교육, 산파서비스 실시, 주야간 탁아소 사업도 병행되었다. 1932년에는 충남 도청소재지가 대전으로 이전되면서 대전에 영아진료소와 우유보급소가 설치되었고, 그 후 미국과 덴마크 독지가들의 원조와 미감리회 선교사 벙커(D.A. Bunker) 부부의 희사로 새 건물이 마련되었다. 원산에서는 1934년 원산 YMCA총무 이상문(李相文)이 고아원을 설립하였고 같은 해 김진국(金鎭國)이 원산고아원을 설립하였다. 1936년 이용담(李龍潭)은 함북 회령의 캐나다장로회 사택 부지 일부에다 함북보육원을 설립하였는데, 이용담이 무성영화 필름을 가지고 전국 순회 공연으로 얻은 수입으로 보육원의 경비를 충당하다가 1943년 신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이어 부인 정길순과 동료 김용성이 공산정권에 보육원이 넘어갈 때까지 그것을 지켜 나갔다.
양로사업
기독교가 수용된 후, 고아사업과 함께 노력을 기울인 곳은 양로사업이다. 1893년 호주장로회 부인선교부가 부산에서 양로원 사업을 시작한 이래 캐나다장로회도 한국에 들어온 이후 얼마 안 되어 함흥에서 기와집 한 채를 구입해 4 명의 여자 노인을 수용한 것이 개신교 양로사업의 시초가 되었는데, 1935년 2월에는 건물 한 채를 추가로 구입해 7명의 노인을 수용하게 되었다.
1918년 12월에 이창석(李昌錫) 장로는 평북 선천에 창신양로원을 설립하였다. 이 양로원은 한때, 선천북교회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으나 이창석 장로의 거액의 희사로 재단법인으로 발전하였다. 기독교인에 의한 민간 양로원으로는 고아사업으로 이름이 높은 오긍선이 1931년 서울 옥천동 고아원 근처에 경성양로원을 설립한 것이다. 오긍선이 고아원 및 양로원 사업에 주력한 것은 그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면서 그곳의 자선기관을 많이 보고 견문을 넓혔기 때문이다. 경성양로원은 그 뒤 이윤영에게 경영권이 넘겨지고 세검정 삼각산 밑으로 옮겨 청운양로원으로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해방 전후를 통해 한국의 양로원사업에 빼놓을 수 없는 분은 신망애양로원을 설립(1934)한 한형세 장로이다. 그는 해방 후와 6·25 때에도 이 사업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여 혼란기에 의탁할 데 없는 노인들을 구하기 위한 양로사업에 크게 공허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부녀사업
여선교사와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이 전개되었다. 1919년 평양에 온 선교사 웰즈(L. Wells) 부인이 시작한 루라 웰즈학원(The Lula Wells Institute)은 소박맞은 부인, 과부, 취학 못한 소녀 등 불우한 여성을 모아서 4년 과정으로 보통학교 과정을 교육시켰다. 1922년에는 한국 주재 각 교파 선교단체협의회 내에 사회봉사위원회를 설치하고, 호주장로회 선교부와 한국 구세군에 협조를 요청하여 1926년에는 서울에서 '소녀의 집'을 개관하였다. 뒷날 '서울부녀관'으로 개칭, 발전시킨 이 기관은 구세군 여사관 아케홀름(Mrs. E. Akeholm)과 린드퀴스트(E. Lindquist) 등이 관리하였다.
1926년 구세군에서는 천연동에 '여자부양소'를 설립하고, 직업여성들의 직업훈련기관으로 만들었다. 한편 호주장로회 선교부 왓슨(Watson) 부인은 부산에 여성 직업농잠학교를 설립하고 수공예기술 등의 직업교육을 실시하였다. 역시 호주선교회의 여 선교사 커(Kerr)는 경남 통영에 여성직업학교를 설립하였고 1937년에는 새 교사를 건축하였다.
일찍이 보구녀관을 설립하여 여성보호에 앞장섰던 감리회 선교부는 각 지역에 '여자관' 혹은 '사회관'을 건립하여 여성의 교육과 계몽, 구제사업, 전도 등 여성사업을 전개했는데, 1906년의 원산 보혜여자관 설립, 1920년 서울태화사회관 설립, 1922년에는 개성고려여자관 설립에 이어 춘천여자관 등을 설립하였다.
그 밖에 YWCA를 통한 부녀사업과 기독교여자절제회의 활동은 한국의 여성운동사상 그 족적이 뚜렷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교파별 여성단체 등에서도 윤락여성사업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부녀사업을 전개하였다. 기독교계의 이러한 사업은 당시 남성 우위의 사회에서 인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던 여성들을 보호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주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빈민구제사업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 기독교회는 <선교와 구제>를 두 축으로 하여 설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빈민구제에 남달리 심혈을 귀울였다. 1900년 11월 11일, 한국 감리회에서는 빈민구제와 여성선교, 특히 극빈자 구제를 일차 목적으로 하여 '보호여회'가 창립되었다. 이는 여성조직으로 회장은 여몌레(余袂禮)였다. '보호여회'는, 다시 이미 일반 교회가 하고 있던 것과 같이, 가난한 교인을 구제하는 일과 환자를 돌보는 일, 상사(喪事)를 당한 가정에 부조하는 등의 구제 활동과 함께 전도활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하였다.
1919년 전후하여 독지가 김주용은 '행랑방 제도'를 제정하는 한편, 빈민들이 억울하게 인권침해를 당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서울에 '보린회' 를 조직하고, 빈민들에게 저렴한 회비만 받고 거처를 빌려 주었다. 즉 그는 아현동 산 8번지에 대지를 확보하고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연립주거지 100여 개를 짓고 빈민들에게 빌려 주고 저렴한 회비만을 받았다. 말하자면 극빈자들의 주택문제를 구제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해방 후 홍병선, 김우현 등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인수되어 기독교사회사업단체로 발전하였다.
1924년 구세군에서는 걸인을 위한 숙박시설을 겨울 동안만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에 시작된 구세군 자선남비를 통한 모금액이 대부분 이 사업에 소용되었다. 1936년 감리회의 정지강 목사는 '애린원' 원생들과 함께 폐품사업을 벌였다. 이는 폐품을 수집, 재생하는 사업으로 수선기술을 습득시켜 자립기반을 닦게 하고, 일반 빈민 구호 사업과 모자원 사업 경비 등에 이를 충당하였다.
이렇게 기독교계가 일찍부터 구제사업에 나선 것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는 예수님의 말씀을 일찍부터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에 가능 했던 것이다.
맹 농아 사업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1890년 미감리회 여 선교사 홀(R.S. Hall)은 , 그의 남편 홀(J. Hall, 許乙) 이 평양에서 헌신적으로 의료사업을 전개하다가 순직한 후, '기홀병원'을 설립하고 활동하였다. 1894년 평양 진료소에서 홀 여사는 조수인 오씨의 딸 맹인 소녀 1명을 데려다가 점자를 교육시킴으로 한국 최초의 맹인 사업을 시작하였고, 1897년 뉴욕식 점자방식을 이용한 최초의 한글 점자인 평양식 점자를 창안하여, 1898년 평양 기홀병원 내에서 여자 맹인들을 모아 본격적으로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다. 1903년 평양 정진여학교안에 맹인 여학교를 개설하였는데 이는 동양 최초로 실시된 맹인 통합교육인 셈이다. 그 뒤 미국인 독지가 록웰(Nathan Rockwell)의 도움과 그의 사망 후에는 부인과 의사인 딸이 계속적으로 홀부인의 맹인사업을 도왔고, 1906년에는 뉴욕의 클로크(Clocke) 부인이 한국 맹인소녀들의 사업을 위해 거액을 희사하였다.
1904년에는 북장로회의 선교사 마펫(S.A. Moffett) 의 부인이 남자 맹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홀 부인이 병원을 수옥리로 이전, 확장하고 농아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농아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1912년 현재 맹인 학교 전체 39명 중 농아는 10명이었다. 1915년 홀 부인의 맹아학교가 마펫 부인이 설립한 남자 평양 맹아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게 되었다. 홀 부인은 이렇게 남편이 일찍 사망한 후, 남편의 숭고한 선교정신을 기려 한국의 특수교육을 일으키고 발전시켰다.
1910년대에는 백사겸(白士謙)이 맹인을 대상으로 직접적인 선교활동은 시작하였다. 1926년 경에는 서울의 승동교회 안에 맹인전도반을 설치하고 맹인 오현상 전도사가 맹인선교에 헌신하였다. 1935년에는 이창호 목사가 평양 마포삼열기념관에서 남자 맹인들을 모아 교육과 선교활동을 병행하였다.
맹인 전도와 관련, 1935년 장로교 평양노회 도제직회에서는 남산동에 평양맹아학원을 설립, 운영하였다. 이들에게는 점자교육과 함께 기술교육을 실시 하여 자립의지를 심어 주고 신앙교육도 겸하였다. 특히 박윤삼이 맹아학교 내에서 처음 실시한 농아를 위한 주일 예배는 한국 농아교회의 효시가 되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농아교육은 평양의 맹아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맹인사업과 관련, 꼭 기억해야 할 분이 있다. 기독교인 맹인사업가 박두성(朴斗星)이다. 그는 전 생애를 맹인사업에 헌신했던 분으로 맹인의 통신교육을 위해 육화사(六花社)라는 회사를 운영하였고 맹인 노학우 등과 함께 '조선맹인사업회'를 조직하여 회보를 발행하고 맹인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점자 개량에 노력하여 노학우, 전태환, 이종덕, 김영규, 왕석보 등의 맹인들과 점자를 연구하여 '32점식'을 채택하고 이를 다시 혁신하여 1926년 새로이 '한글점자'를 완성하였다. 이 '한들 점자'는 1927년 12월 4일 에 공포되었는데 이 날이 '점자기념일'이다. 그는 또 대한 성서공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한글점자에 의한 성경간행을 주선하였는데, 1934년에 간행된 점자 「요한복음」은 한국점자성서의 효시가 되었고, 그 뒤 신약성서가 차례로 간행되었다.
사회관 사업
감리회 계통에서는 '사회관' 사업이 활발하였다. '사회관'이라는 것은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건립한 기관이나 건물을 말하는데, 주로 여성들을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여자관'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감리회에서는 서울의 명월관을 인수하여 태화기독교사회관을 설립하고 여성직업교육과 아동보건사업, 여성의식개발을 위한 프로그램 실시 그 외에도 성인교육, 영어성경반, 지역사회개발에 힘썼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한국 최초의 사회관으로 많은 업적을 쌓았고 그래서 그 이름 또한 널리 알려졌다.
남감리회 선교부에서는 개성의 고려여자관, 원산의 보혜여자관, 춘천의 춘천 여자관, 철원 등지에 여자관과 함께 사회복지관을 건립하였다. 1934년에는 기독교인 이영학(李英學 : 이창석 장로의 아들)이 평북 선천에 선천회관을 설립하고 지역사회 향상을 위한 복지 시설과 프로그램도 제공했다.
1937년 4월에는 기독교인 여성사회사업가 고봉경, 고황경 자매가 서울 교외에 '경성자매원'을 설립하고 여성사업을 통한 지역사회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기타 사회사업
이 밖에도 기독교계에서 행한 사회사업이 많았다. 가령 여행자를 돕는 사업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1936년 10원, 구세군에서는 '부산여행자원조의 집'을 설치하여 여행자구조사업을 벌였는데, 일본 밀항을 시도하는 한국인이나 여비가 없거나 숙소가 없는 여행객을 구조하거나, 부녀자를 보호했으며 또 보호시설 등에 수용을 알선하기도 하였다. 또 1930년대에는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들에게 옷을 지어주는 '도르가회'(Dorcas Socirty) 라는 단체가 있어 특수한 활동을 폈다.
이 밖에도 YMCA, YWCA 등 기독교회의 자매단체가 교육, 그룹활동, 계몽집회, 심신단련, 상담, 사회봉사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기독교 사회사업의 일익을 감당하면서 기독교의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맺는말
한국 기독교계의 사회사업은 교육, 의료사업에서 시작하여 여러 방면에서 이뤄졌다. 처음에는 복음 전파자들이 한국인에게 쉽게 접근하기 위한, 일종의 선교방편으로 이러한 사회사업을 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사회사업은 그것 자체로서 하나의 선교기관 혹은 선교방법이 될 수 있었다. 사회사업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사회사업은 기독교를 확산시키는 데에 크게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이미지를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하는 종교임을 이해시키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교회의 일상적인 활동만으로써는 세울 수 없는 이미지였다. 또 사랑, 희생, 봉사, 나눔이니 하는 말 자체가 생소한 전통적인 한국사회에 대해, 기독교의 이같은 활동은 사회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데에도 일정하게 공헌하였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 갈 것은 앞에서 본 사회활동이 대부분 일제하에 들어와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한국에서 사회사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시기가 일제하에 이르러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지만, 이와는 달리 일제 식민지하 우리 민족의 생활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한 단편적인 증거라고도 하겠다. 한편, 이같은 사회사업은 기독교의 이미지를, 민족의 선두에 서서 사회를 개혁하는 종교라는 인상을 준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자들의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비판은 이런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일제하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기독교의 사회사업은 민중들의 현실적인 삶과 고난에 참여하여 민족적 역량을 배양하였다는 의미는 강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당시의 또 하나의 민족적인 과제인 항일민족독립의 과제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아쉬움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사회사업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의지할 데 없는 자를 찾아가고 이끌어내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회복하고 인간이 누려랴 할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것은 복음전파의 외연을 확대하는 것이었고 교회가 채 수행하지 못하는 복음사역의 일익을 담당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회사업의 정신과 전통을 오늘의 시점에서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해 가야 할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