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한국장로교회화 고신의 전통

0 461 2017.02.06 17:31
한국장로교회와 고신의 전통

이상규 (고신대학교)
서론적 고찰
어떤 시대의 교회 혹은 교회의 역사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평가의 규범(norm)은 그 시대의 교회가 얼마만큼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해 왔는가에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서 있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선포할 책임을 부여 받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가의 규범은 그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어떻게 완수해 왔는가에 기초한다. 어떤 시대의 교회가 고난과 박해를 받아도 그것이 교회의 본질과 사명, 곧 말씀을 지키며 충성된 증인이 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아름답고도 영광스러운 고난이다. 또 교회가 비록 사회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아도 그것이 교회의 본질을 지켜 가며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것은 가치 있는 고난이다. 그 시대의 교회가 교회에 주어진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경주해 왔는가 하는 점은 교회사를 평가하는 중요한 규범이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교회(단)은 1952년에 총노회를 조직하여 한국에서의 또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1956년에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신교회(교단) 총회를 조직하였고, 총회 조직을 기념하여 해외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의해 1958년 5월에는 김영진 목사를 대만에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고신 교회는 주로 부산경남지방에 산재해 있었으나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현제는 1,800여개처의 교회 44여만명 신자를 가진 교단으로 성장하였고, 23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고, 고신대학교와 신학대학원, 복음병원 등의 기관과 ‘기독교보’(주간 신문), ‘월간 고신’(월간) 등을 발간하고 있다.

1. 기독교의 전래와 일제하의 교회
한국과 기독교와의 접촉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개신교회와의 첫 접촉은 1832년 내한하였던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만주를 징검다리로 한 서구 교회와의 간헐적인 접촉이 계속되었다. 한국에서의 기독교 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1876년의 개항(開港)이었다. 개항은 선교사들의 내한을 가능하게 해 주었는데, 1884년 알렌의 내한과 이듬해의 언더우드, 헤론 등이 내한함으로서 미국 북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다. 1889년에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J. H. Davies)가 내한함으로 호주교회의 한국선교가 시작되었고,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회가,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가 각각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말하자면 미국과 호주, 캐나다에서 온 4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장로교회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이들 4선교부는 각기 분담된 지역에서 활동했으나 연합하여 1907년 대한 예수교장로회 독노회(獨老會)를 구성하였다. 독노회를 구성할 당시 장로교회는 전국적으로 785개에 달했고, 세례교인은 1만 8천여명, 전체교인은 7만 2천명에 달했다. 한국인 장로는 47명에 다했다. 노회가 조직되자 그 해 평양의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한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등 7인에게 목사안수를 베풀었다. 그래서 이들은 한국 최초의 장로교 목사가 되었다. 12개 신조는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노회가 조직된 지 5년 후인 1912년에는 7개 노회의 조직과 함께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구성하였다. 이 당시 한국인 장로교 목사는 52명이었고, 장로는 125명에 달했다.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 한지 불과 25년이 못되어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였고, 한국기독교는 일제의 식민통치하에 놓이게 된다. 이 기간동안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일관되게 추진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탄압이 1930년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2천명이 투옥되었고, 주기철, 최상림, 이현속 등 30여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해방 후 마지막가지 남아 있던 20여명의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광복과 함께 출옥하였다. 그들 중 주남선 목사, 한상동 목사, 손명복 전도사, 이인재 전도사, 그리고 조수옥 권사 등이 고신교단 형성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신학적으로 볼 때 193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이 때 대두된 진보적 신학의 대두는 신사참배 문제와 함께 한국교회에 커다란 문제를 야기하였다. 적어도 1930년대 이전에 내한한 초기 선교사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인 혹은 보수적인 선교사들이었다. 그러나 주로 캐나다 선교부를 통해 파종된 ‘다른 전통’은 1930년대부터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34, 35년 장로교 총회에서는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신학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와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보수적인 입장의 신학운동이 퇴조하고 자유주의 신학이 그 지경을 넓혀 갈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은 후일 한국장로교회의 변화와 분열을 가져오는 대립의 핵이 되었다.

2. 해방과 교회재건운동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일제하에서 범한 신앙적, 민족적 범과를 청산하고 교회재건, 곧 영적쇄신을 통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해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두 가지 과제를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친일 인사들은 신속한 변신을 통해 여전히 교권을 장악하였고, 교회재건을 위한 노력은 친일적 전력을 지닌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좌절됨으로서 그 이후의 한국교회에 적지 않는 문제를 야기하였는데 그것이 곧 교회분열과 대립이었다.
부연하면, 해방 후 북한에서 교회의 재건과 쇄신을 위한 노력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공산정권에 의해 좌절되었고, 기독교는 다시 탄압을 받았고 오늘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다. 장로교 인사들은 1946년 6월 서울 승동교회에 모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南部總會)를 조직하고 배은희(裵恩希) 목사를 회장으로 함태영(咸台永) 목사를 부회장으로 선출하였는데, 이것은 치리회의 조직, 그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한국교회에서의 진정한 의미의 교회쇄신운동은 부산․경남지역, 곧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한상동, 주남선 등 출옥한 인사들이 1946년 남하하여 회개와 자숙을 요구하고 진정한 교회 쇄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김길창(金吉昌), 권남선(權南善) 목사 등 친일적 인사들의 저항과 그들의 노회 주도권 장악 기도에 의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 못했다. 이들 친일적 인사들은 교권 장악을 통해 기득권을 확보하고, 1949년 3월 8일 부산 항서교회당에서 기존의 교회조직을 이탈하여 또 하나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시작이었다.

3. 고신교단의 형성

고려신학교의 설립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치하에서 투옥되었던 주남선, 한상동 두 목사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국 교회재건과 신학교 재건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다운 신학교육 없이는 한국교회를 재건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석방된 이들은 이 구상에 따라 1946년 5월 신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였고, 6월 13일부터 8월 10일까지 2개월간 진해에서 제1회 신학강좌를 개설하였는데, 이 강좌가 고려신학교 개교로 이어지는 신학교육의 시작이었다. 고려신학교가 정식 개교된 때는 1946년 9월 20일이었다. 박형룡과 박윤선은 교수로 초빙되었다. 고려신학교는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통한 목회자 양성이 목표였을 뿐 만 아니라 해방 후 교회재건운동과 영적 쇄신운동의 동력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특히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고신교단 형성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학교는 고신교단 형성의 신학적 혹은 이념적 모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남노회의 분열과 총회로부터의 단절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해방 후 경남지방에서는 교회재건을 주장하는 인사들(주로 출옥한 신사불참배론자들)과 신속한 변신을 통해 교회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자들(주로 친일적인 교권주의자들)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전자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바른 신학의 확립,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 쇄신운동을 주장하였으나 후자는 교회재건 원칙을 거부하고 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별도의 경남노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장로교 총회는 경남노회의 문제를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당시 총회는 김길창 목사가 임의로 조직한 경남노회 문제를 정당하게 처리하지 못했고, 결국은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경남노회(이를 ‘법통노회’라고 했다) 대표들을 총회에서 축출하는 오류를 범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기득권을 행사하면서 반민특위(反民特委)가 와해되고 결국 민족정기를 바로잡지 못했듯이 한국교계에도 친일적 교권주의자들이 자숙하지 않고 교권을 장악함으로서 신앙 정기가 서지 못했고 교회쇄신운동은 도리어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고신교단이라는 별도의 치리회 조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고신교회(단)의 조직
1951년 5월 피난지 부산의 중앙교회에서 모인 총회에서 부당하게 축출된 인사들, 곧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경남법통노회 인사들은 별도의 조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당에서 총노회(總老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발표된 총로회 설립 취지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취지: 현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는 본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異) 교파적으로 흐름으 로 이를 바로 잡아 참된 예수교 장로회 총회로 계승하기 위하여 총로회를 조직함.
목적 : 전통적인 대한 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괄하며 개혁 주의 신앙운동을 하여 법통노회를 장차 계승키로 함.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참된 교회의 한 지체로서 고신교단의 출발이었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회장 이약신(李約信) 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 서기 홍순탁 목사, 회록서기 오병세 목사, 부서기 윤봉기 목사, 회계 주영문 장로 등이었다. 이 당시 고신교단에 속한 교회는 320여개 교회였고 이중 90%정도가 부산. 경남 지역에 위치한 교회였다.
총로회에서는 한국교회가 범한 신사참배의 죄를 자백하고 자숙하기 위한 3주간의 특별집회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3주간의 자숙의 기간을 보내고 1952년 10월 16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發會)를 공식 선포하였다. 총노회가 조직될 당시는 경남지역이 중심이었으나 점차 타 지역으로도 교세가 확장되었다. 1956년까지는 여섯 개 노회가 조직되었으므로 그해 9월 20일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고신)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 교단에 속한 교회는 568개 처, 목사는 111명, 전도사 252명, 장로 157명, 세례교인수는 15,350명으로 보고되었다. 총로회를 조직한 교회는 이를 기념하여 대만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였는데 그 결과로 1958년 김영진 목사를 대만에 정식 파송 하였다. 이것이 고신교단의 선교운동의 시작이었다. 고신교단은 단순히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신앙적 유산만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과 개혁주의 교회건설 그리고 개인생활의 순결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교단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다.
총회를 조직한 지 4년이 지난 1969년12월 13일에는 (1959년 연동측과 분리된) 승동측과 합동하여 ‘합동교단’으로 발전하였으나 1963년 다시 고신으로 환원하였다. 합동 당시의 고신교단에 속한 교회수는 590여개였고, 세례교인수는 17,500명이었으나, 환원총회를 구성했을 때 교회수는 445개 교회였고 세례교인수는 10,200명이었다. 환원은 한상동목사 개인의 결단, 곧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으로 촉발되었다. 그 후 고려신학교와 이사, 그리고 교수단 내부에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인가’건과 관련하여 심각한 다툼이 일어났고, 특히 복음병원을 둘러싼 대립도 없지 않았다. 1970년대 초에는 부산노회(한상동)와 경남노회(송상석) 간의 대립은 교단의 분열로 이어졌고, 불신법정 소송논쟁을 불러왔다. 경기노회와 경남노회 중심이 일단의 인사들은 반고소론(反告訴論)을 명분으로 분립하였으나, 1982년 석원태 중심의 경기노회측을 제외한 경남노회측은 다시 본류로 복귀하였다.
고신교회(단)가 설립된 지 56년이 지난 현재 고신교회는는 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회로서 1600여 지역교회와 35만의 성도가 있으며, 고신교단 산하에는 고신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복음 병원과 같은 교육, 의료 기관들이 있다. 또 세계 40여개 나라에 약 2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또 고신교단은 주간 신문인「기독교보」와 월간지인「원간고신」을 발간하고 있다.

4. 고신교회(단)의 신학적 배경
고신교단의 전통 혹은 이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교단형성의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 다소 언급되었지만 이를 3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 (개혁주의 신학)
신학은 신앙적 삶과 교회적 생활을 결정해 주는 것이므로 개인이나 단체의 신학이 어떠하냐 하는 점은 그 개인과 단체의 삶과 신앙, 교회적 생활을 결정해 준다. 한국교회는 1930년대를 경과해 가면서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고 그 결과 신사참배 요구를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 설립은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써 바른 신학운동의 일환이었고,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근본 동기를 지니고 있었다.

둘째, 신사참배 반대 투쟁을 통한 생활의 순결 (개혁주의적 생활)
일제하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교회의 본질적 신앙을 지키려는 숭고한 싸움이었다. 그들은 박해를 받고 투옥 되었으나 그것은 영광스러운 고난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신앙의 정절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려는 거룩한 투쟁이었고 바른 생활을 위한 경건한 투쟁이었다. 고신교회는 교리만 강조하지 많고 바른 삶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 바른 삶이란 건실한 교리적 기초 위에서 순결과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이다.

셋째, 회개와 자숙을 통한 교회 재건(쇄신) 운동 (개혁주의 교회건설)
해방 후 교회정화와 영적 쇄신운동, 곧 교회 재건운동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새롭게 하기 위한 불가피한 요청이었다. 이것은 또한 교회 개혁을 위한 투쟁으로서 바른 교회운동이었다. 고신교회는 해방 이후 단지 외형적 재건만을 추구하지 않고 내면적 갱신과 쇄신을 요구하고 이를 지지해 왔다. 일제 하에서의 상황, 곧 자유주의 신학의 유입, 배교적인 신사참배를 생각해 볼 때 해방이후의 교회의 정화와 영적 쇄신은 긴박한 과제였다.

그래서 한상동, 주남선 등은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 생활의 순결, 교회쇄신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념이나 전통의 문제를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그 집단이나 공동체의 이념이 무엇이었나 하는 점과, 둘째로는 그 이념이 어떻게 계승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점이다. 고신의 이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합의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 이념의 계승과 발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고 이 점은 반성해야할 점이기도 하다.
고신 교회(단)도 여러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기여에도 불구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여타의 교회조직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과오를 반복하고 문제를 노출해 왔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고신교단은 특수하다든가 다른 교단 보다 완전하다는 등의 생각은 옳지 않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Divine institution)이지만 사람들로 구성되는 공동체(Human constitution)이라는 점에서 지사의 교회는 완전하지 못하다. 우리도 동일한 오류를 범했고, 또 범할 수 있는 죄성을 지닌 공동체임을 인식하고 늘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새롭게 확인하는 겸허한 자세가 있어야 할 것이다.

5. 고신교회와 개혁주의 신학
앞에서 고신교회는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한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개혁주의는 루터주의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적 신학을 말하는데,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였던 클로스터(Fred Klooster)는 개혁주의의 독특성이란 바로 ‘성경적 원리’라고 말한바 있다.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근거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한다. 또 그리스도인의 문화 변혁적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한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는 인간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하나님 중심 신학, 성경의 원리를 강조하는 성경중심 신학, 교회적 삶을 강조하는 교회중심의 신학으로 설명되어 왔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개혁주의적인 신앙과 삶의 방식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으로서, 신학의 중심 주제는 인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곧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그리고 성령으로서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또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도 하나님을 알고 그를 신뢰하며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을 16세기적 상황에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말을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하며,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구호이기도 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곧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는 점을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은 성경 외에도 소위 성전(聖傳)이라는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받아드린다. 때로는 이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한다 하여 전통을 성경 보다 우월한 권위로 받아드렸으나 개혁주의는 모든 전통을 배격했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과 함께 성경에 다른 어떤 것을 더하거나 감하는 것을 반대하는 ‘모든 성경’(tota scriptura)을 강조한다. 또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개혁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교회건설이었다. 이것이 교회중심(Church-centered) 사상이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 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神國)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하면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교회 갱신 혹은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고신교회는 이런 신학을 견지하고 있다. (이상규, 고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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